生은 어디서 왔으며 死는 어디로 가는가? 生은 한 조각의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死는 한조각의 뜬구름이 사라짐과 같으니라. 불교(佛敎)는 자립적이고 막강한 위력을 행사(行事)할 수 있는 존재론적(存在論的) 신(神)을 부정(否定)하는 무신론적(無信論的) 종교(宗敎)이다. 대신 인간(人間)을 중심(中心)으로 마음을 닦아 깨치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불교(佛敎) 경전(經典)에서도 신(神)들에 대한 많은 얘기가 나오는데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신(神)은 일종(一種)의 마음의 변형(變形)이다. 사물(事物)의 마음으로 상()相을 읽는 것이라 해도 좋다. 인간(人間)의 실체(實體)는 무엇인가? 인간은 이중(二重) 구조로 되어있다. 하나는 육신(肉身)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마음(心)이다. 육신(肉身)은 사대(四大=地, 水, 火, 風)로 구성(構成)돼 있기 때문에 시간(時間)이 지나면 환원(還元)되어 남김이 없는데 이를 죽음이라 한다. 그래서 육신(肉身)의 나는 가아(假我)라고 하고 마음을 진아(眞我)라고 한다. 마음의 모양이나 형상(形相)을 본적이 있는가? 모양도 형상도 보이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분명히 마음은 있음으로 본래(本來)의 내 마음을 찾아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과학(科學)이나, 학문(學文)이나, 진리(眞理) 추구와 같은 것을 찾는 방법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말(言)도, 문자(文字)도, 생각도, 일체 접근을 불허(不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관(直觀)을 통해서 찾아야 한다. 역대(歷代) 조사(祖師)들이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깨달음을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재창조한 방법을 간화선(看話禪)이라한다. 화두(話頭=의심덩어리)를 들고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깨달아야 무염(無念)을 종(宗)으로 삼고,(생각 없음을 宗旨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로 삼고, (모양 없음을 몸(存在)로 삼고) 무주(無住)를 본(本)으로 삼는다고 한다.(머무름 없음을 근본(根本)으로 삼는다) 원각경 보안보살장에는 "육체(肉體)는 사대(四大)가 인연(因緣)에 의해 가합(假合)하여 육근(六根=眼, 耳, 鼻, 舌, 身, 意)이 생(生)하고 육근(六)과 사대(四大=地, 水, 火, 風)가 안팎으로 합(合)하며 인연(因緣) 기운(氣運)이 그 안에 쌓이고 모여 인연상(因緣相)이 있는 뜻한 것을 마음이라 한다." 고 했다. 그래서 마음은 본래(本來) 청정(淸淨)한데 삶의 무지(無知)로 인해 망상(妄想)과 집착(執着)으로 오염(惡染)되어 있으니 이 집착(執着)과 망상(妄想)을 걷어 내어 무염(無念)이 되면 본래청정(本來淸淨)한 진아(眞我)를 본다고 한다. 결국 존재(存在)가 가아(假我)라는 신념(信念)으로 무아(無我)의 경지(境地)에서 관(觀)하는 것이 깨침이라고 생각이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최고의 인격경지(人格境地)를 수행(修行)을 통해 채득(採得)한 사람이다. 모든 고통(苦痛)을 여의고 고통 없는 세계를 채득(採得)한 사람이므로 신(神)이 아니라 인간(人間)이 자기(自己) 마음을 깨쳐서 성자(聖者)가 된 정신적(精神的) 대 혁명가이시다. 즉 부처는 역사적(歷史的) 인물이지 신비(神秘)한 존재(存在)가 아니므로 불교(佛敎)는 인간 중심의 종교로서 불교인(佛敎人)은 신(神)의 기적 같은 것은 생각지 말고 인간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만들어 주위가 청정(淸淨)해 지고, 사회가 청정(淸淨)해 지고, 나라가 청정(淸淨)해저 불국토(佛國土)를 이루어 모두가 행복(幸福)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