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어느 심리학(心理學) 교수가 선(禪)에대한 연구를 위해
이름난 선사(禪師)를 찾아갔다.
교수는 "선(禪)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하면서,
자신이 연구한 것을 선사에게 인식(認識)시키려고 많은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선사(禪師)는 조용히 찻잔에 차를 따르는데 찻잔이 넘쳐흘러도
계속 따르고 있으니, 그걸 지켜보던 교수가 깜짝 놀라며
"스님! 찻잔이 이미 가득 찼으니 그만 따르시죠."
선사(禪師)는 미소를 지으며 "지금 교수님의 마음도 마치 이 찻잔과 같습니다.
먼저 마음을 비우지 않았는데 제가 어찌 선(禪)을 채워 드리리까?"
우리는 무엇이든 조금만 보고 듣고 알면, 그것이 최상의 진리(眞理)인 줄 알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며 자기 주관을 절대시하려 한다.
이 세상에는 무한한 진리가 있으며 진리는 어떤 고정된 법(法)이 아니고
때와 장소와 여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길을 걷는데 어떤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한 제자가 "스승님이시여 저들의 싸움을 제가 참견하여 말릴까요?"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만 두어라." 하시고 길을 계속 가다가, 이번에 또
싸움하는 사람들이 있어 다른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이시여 제가 저 싸움을 말릴까요?"라고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다문 제일인 제자 '아난다'가 "스승님이시여, 조금 전에는 안 된다고 하시고
지금은 왜 하라고 하셨습니까? 라며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전에 그 제자는 성격이 거칠고 참을성이 없으니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게 좋고, 지금 말한 제자는 성격이 온화하고 설득력이 있으니
능히 싸움을 잘 말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 께서는 사람마다 근기(根機)에 맞게
팔만 사천 가지 법문을 하신 것이다.
내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진리(眞理)는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니, 언제나 하심(下心)으로 마음을 비워야,
더 많은 진리(眞理)를 보고, 듣고, 묻고, 받아들여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