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큰 길로 들어오는 산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고 그 옆에 작은 초가집이 있었다.
주인은 바위 위 큰 소나무 그늘이 좋아 그곳에서 쉬기도 하고, 술도 마시고,
눕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런데 어느 날 도력(道力)이 높은 스님이 찾아와서 이 바위에 불상(佛像)을 크게 새겨 놓으면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불심(佛心)이 생겨 마을에 재앙(災殃)이 없어지고 평화(平和)로울
것이라 하여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
그 후로는 초가집 주인은 그 바위에 올라가는 것부터 조심스러워 졌다.
불상(佛像)을 조각할 바위인데 함부로 올라가거나 그 위에서 술을 마시거나 눕는다는
것은 죄(罪)를 짓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돌은 그대로 그때 그 돌인데 말이다. 이런 것을 망상(妄想)이라 한다.
호숫가에 새 집을 짓고 조경을 하며 잠을 자는데 밤마다 꿍, 딱, 덜컥, 부시럭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는 무섭다고 그곳에서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하기에
"다 사물(事物)의 조형적(造形的) 특성(特性)이야, 새 집을 지으면 목재가 마르고 힘 받는 곳은
늘어나거나 줄어들면서 제자리를 잡는 소리야."
이렇게 알려 주어도 습관화(習慣化)된 망상(妄想)은 떠날 줄을 모르는가 보다.
대개 옛날에 무지(無知)해서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묘(妙)한 일들은 신(神)의 일로
치부하여 그 신(神)을 달래기 위해 각가지 주술과, 점술과, 사당과, 무당이 등장했다.
그것이 원인(原因)에 의해 일어나는 당연한 인과(因果)의 법칙인데 우리는 그 원인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불교(佛敎)에서는 기적(奇蹟)이란 본래(本來) 없는 것이며 다만
우리가 그 원인(原因)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불교가 신(神)을 인정(認定)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神)으로 간주하는
방법이 논리적(論理的)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사물은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특성(特性)이 있다.
대나무는 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으며 등나무는 구부러지는 특성이 있고
물은 수평(水平)을 이루려는 특성이 있다. 나무(木)와 흙(土)과 돌(石)들도 우리가 아는 부분과
알지 못하는 특성이 있어, 이들의 결합(結合)과 분해(分解)의 과정에서 나오는 알지 못하는
특성이 무한히 많은데, 이것을 '최한기'는 기(氣)라고도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불성(佛性)이라고도 하고,
'푸로드리히 니이체'는 사물의 조형적특성(造形的特性)이라고도 했다.
사물(事物)이 가지고 있는 특성(特性)이 불성(佛性)이며 이를 신(神)으로 간주한다면
모든 신(神)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대상(對象)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공생공명(共生共命)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것은 인드라망(그물코)처럼 인연(因然)으로 서로 얽혀있으니
이웃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幸福)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도(道)를 깨친다는 것은 사물의 기(氣)나 성(性)이나
조형적 특성(特性)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깨달았을 때 무지(無知)로 인한 망상(妄想)이 스스로 사라지며
마음이 맑고 밝고 가벼워져 사물의 위를 부상(浮上)하여 내려다보는 것이다.
-----맹물(성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