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푸르고 무성한 잎들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을 때면, 아주 오래 전 소년시절에 들은 김삿갓 시(詩) 한 구절이 생각난다. 천하에 거지, 떠돌이, 방랑자로 살아가는 김삿갓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하여 길가 무덤에 앉아 쉬고 있는데, 어느 아낙네가 술병을 들고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김삿갓이 물었다.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가십니까?" "골 원님에게 올릴 상소문을 받으려 갑니다." "거 내가 써 드릴 터이니 술이나 여기 내 놓으시오." 아낙은 "왠 거지가 웃겨...." 하며 가려는데, 김삿갓이 술병을 빼앗아 꿀꺽꿀꺽 다 마셔 버렸다. 아낙은 푸념을 했다. 일 년 전에 남편이 부잣집 아들에게 매를 맞아 몇 달 앓다가 죽어서 너무 억울해. 골 원님에게 송장을 올렸지요. 그런데 원님은, "당신 남편은 싸우고 몇 달 후에 병으로 죽었으니 가해자는 잘못이 없다."고 판결을 내려서, 다시 글 잘 쓴다는 분이 있다기에 어렵게 술 한 병을 구해서 가져가는 중인데,
왠 거지가 다 먹어 버렸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 고 하며 울고 있다. 김삿갓은 즉석에서 벼루와 붓을 봇짐에서 꺼내 몇 자 적어서 주었다. 深秋一葉 病於嚴霜 落於微風 (심추일엽 병어엄상 낙어미풍) 嚴霜之故耶 微風之故耶(엄상지고야 미풍지고야) "깊은 가을에 나무 잎이, 된 서리를 맞아 병들어, 미풍에 떨어졌다. 된 서리의 잘못이냐? 미풍의 잘못이냐?" 아낙이 그 글을 원님께 올렸더니 그 이튼 날 즉시 죄인을 불러 다시 판결을 내렸다. "부잣집 아들은 이 아낙의 남편을 때려서 두 달 동안이나 앓다가 몸살 감기로 죽었는데, 그 원인은 감기가 아니라 매 맞아 골병으로 인한 것이니, 이 여인에게 쌀100 가마니와 은 일 천량을 주도록 하여라." 여인은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가을만 되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이 시(詩)가 생각나서 된 서리(?)를 생각하여 본다. 자연은 무상(無常)하여 모든 존재는 다 때가 되면 된 서리를 맞게되고
또 미풍에 떨어지니, 인간도 이 도리(道理)를 벗어날 수 없기에
모두가 이 생(生)을 떠나 본래(本來)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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