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이 깨닫고 나서 하신 말씀이 "보고 듣는 것 외 따로 진리(眞理) 없다"고 하셨다. 많은 선사들이 화두를 들고 오랜 씨름을 하다가 한 순간 홀연히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깨침을 얻었다 하는데 이를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 한다. 우리의 늘 보고 들고 생각한 고정 관념에서 시작하여 집착이 떠나지 않는다. 뻐꾸기가 뻐꾹 꺼리는 소리나 까마귀가 까욱 꺼리는 소리를 그냥 그대로 듣지 않고 우리가 과거에 그에 관한 얘기를 들은 기억의 자료(고정관념)에다가 내 주관적 판단을 감미해서 뻐꾸기 소리는 아름답고, 착하고, 평화롭고. 까마귀 소리는 왠지 안 좋고, 불길하다 .고 느낀다. 사실 뻐꾸기나 까마귀는 자기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나타냈을 뿐인데.... 뻐꾸기가 슬프다고 엉엉 소리를 낼 수 있는가? 까마귀가 기쁘다고 하하하 웃음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그들의 언행(言行)을 인간의 구미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인간 우월주의의 집착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에 집착하지 말고 그 본성(本性)을 보고 들으라 했다, 시인(詩人)은 모든 사물에 인격(人格)을 불어넣고 그 내면의 의식의 흐름을 지켜본다. 하늘과 구름, 산과 숲, 짐승과 새들, 풀과 꽃과 나비의 마음까지 들여다 보고 경이로움을 발견한다. 옛날 우리 노래 가락에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곱아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 운다."는 가사가 있었다. 모든 생명은 식욕과 성욕이 본능이라 자고 일어나면 배가 곱아서 먹이를 찾고, 저녁에는 사랑하고픈 생명들의 본능을 보고 들으라는 깊은 뜻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경전(經典)에는 범음(梵音), 해조음(海潮音), 묘음(妙音), 관세음(觀世音)의 소리의 본성을 깊이 따라 들어가다 보면, 태초 우주의 생성과 사물의 조형적 특성(佛性)을 깨달아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성취(成就)할 수 있다고 선사(禪師)들은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