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이 세상(世上)에 존재(存在)하기 이전에 어디에 있었는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해답을 찾는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무생법인(無生法印)에 접근할 수 있을게다.
존재는 조건에 따라 연기(緣起)하니 실체(實體)가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狀況)일 뿐이다.
즉 구름(雲)이 조건에 따라 물(水)이 되어 만물을 적시고,
식물이나 동물의 몸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흘러 강물이 되고,
증발하여 구름이 되니, 형(形)은 바뀌어도 그 본래의 질량(質量)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티끌이 모여 대지(大地)가 되였고 그 대지가 어머니처럼 만물을 생산(生産)해 내니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인연(因緣)을 설(說)한 경전(經典)은 불변(佛變)의 진리(眞理)인 것 같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빚었다는 성경(聖經)의 비유(比有)도 맞는 것 같다.
존재의 근본이 흙이며 흙에서 생명이 탄생하며 생명은 흙의 성분을 먹고 자라다 흙으로 돌아가니 말이다.
다만 인식론적(認識論的) 존재인 그 신(神)을 어디에 비유하며 그 영역을 어디까지 인식해야 하는 것일까?
불교(佛敎)에서는 사물(事物)을 고정된 실체(實體)로 보지 않고 잠시 머물다 가
곧 없어지는(변화하는) 가유(假有)로 보라고 한다.
선사(禪師)께서는 사람 몸 받고 그 명(命)이 다하기 전에 아상(我相=개념으로서의 나)이 먼저
한번 크게 죽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나'라는 환상(幻相)의 존재가 없이(無我) 세상을 보면 진리(眞理)로 가득 찬 세계가 보인다.
연기(緣起)의 법계(法界)에서 성기(性起)의 법계(法界)를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이 열린다고 한다.
심안(心眼)이 열려야 육신통(六神通)을 얻고 천안(天眼)과 불안(佛眼)을 접해
삼세(三世 =전생,현생,후생))를 본다고 한다.
출생(出生)이 전생(前生)에서 현생(現生)으로 입학하는 행사(行事)라면,
죽음(死)은 현생을 졸업하고 후생(後生)으로 입학하는 과정이 아닌가?
누구나 때가되면 가야하는 순리라면 당연하게 맞이하는 게 도리라 생각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종교가 영생불멸(永生不滅)을 설(說)하는 것은 아상(我相)으로 가득 차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중생의 의식(意識)을 바꾸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종교는 사후(死後) 세계를 그려서 미리 보여주고 있다.